2008년 06월 19일
행운의 동위원소: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선악과.
(From 3차 수정본)
인류는 여전히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며 생물로서의 삶을 영위해나가고 있다.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한, 적어도 이 사회가 모든 기능을 정지하고 생물학적 멸망을 맞이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 변화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 중의 하나는 우리 인류가 불과 십수 년 전에 갖고 있었던, 중요하면서도 가시적이진 않았던 어떤 작은 특성 하나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 인류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였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탐욕스런 욕심이며 그로 인한 우리의 맹렬한 투쟁심이었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통해 말한다.
"양이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다."
행운집적기가 바꾼 세상의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보편적 가치 질서가 존재함을 알려주었고, 이 탐욕스런 욕심의 원더랜드 속에서 우리는 행운집적기라는 토끼를 쫓아 진실로 평등한 기회와 결과 속으로 인도 받았다. 행운집적기의 발명과 보급은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카를 마르크스의 이상적 혁명일지 모른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의 불온한 양을 잡아먹은 토끼가 이제 인류를 향해 입맛을 다시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본성의 변화 - 구원을 위해 제거 받은 이 악덕은 과연 우리에게 참된 악덕이라 할 수 있는가?
"단어들은 그러한 단어들을 사용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T. 홉스,『영국철학대계』3권, 『리바이어던』 1부 6장.)
행운이라는 절대적 보편 가치의 발견 아래 폄하된 상대론적 관점을, 저 아래 역사의 단층에서 조심스레 발굴해보자. 개와 고양이에게 있어 소음을 유발케 하는, 그리하여 인간 거리의 질서와 생활의 안정을 파괴하는 발성과 생식의 능력을 우리 인간은 감히 '악덕'이라 규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들의 생활을 위한 '편의'일 뿐이며 그들의 발성과 생식의 능력은 '악덕'이 될 수 없다. 때때로 우리가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그들의 시끄러운 울부짖음과 맹렬한 성적 본능은 그들의 개체를 특징짓는 중요한 개성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인류는 탐욕으로 인한 투쟁과 경쟁에의 욕구를 잃었다. 사람들은 느긋함과 여유 속에 물들어간다. 그들의 부족한 노력은 곧 그들의 행운으로 어느 정도 벌충될 수 있고, 그로 인해 필요하다면 어느 때에라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사람들을 더 깊은 나태로 몰아넣는다. 행운의 힘이 알려진 이래 행운집적기가 함께 하는 한은 누군가의 업적이 더는 전과 같이 진실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위대한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탐욕 - 자신의 존재에 불멸을 부여하는 그 위대한 업적에의 동인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 사회는 정체해가고 있다.
코리듐 312, 양성자수 126, 중성자수 186.
마법수의 양성자.
전체 코리듐의 약 99.99999999% 차지.
일명 행운의 원소.
코리듐 310, 양성자수 126, 중성자수 184.
이중 마법수의 원소로 수백 배 더 긴 반감기.
전체 코리듐의 0.00000001% 차지.
행운의 동위원소. 그 이름은 불행.
실제 불행이란 행운보다 적은 것이지만 그것은 보다 강렬하며 오래 기억된다. 이제 우리는 집적기가 행운과 거의 동일한 화학적 성질의 동위원소를 함께 집적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정체도 그러한 불행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류는 왜 다 함께 행운집적기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 경제학의 간단하며 진부한 이론 하나를 살펴보자.
서로 분리된 밀실에서 심문을 받는 죄수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이 각각 범행을 부인하면 1년의 실형을 살게 되며, 두 사람이 모두 자백을 할 경우에는 5년형을 받게 된다. 반면, 한 사람이 자백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이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면 자백을 한 사람은 협상의 성과로 무죄 방면을, 범행을 부인한 사람은 덤터기를 쓰고 홀로 10년형을 받게 된다. 범죄를 공모할 당시의 굳은 신뢰에도 불구하고 범인들은 으레 서로를 의심하며 모두 자백을 하고 만다.
"이웃의 비이기성을 칭찬하는 까닭은, 칭찬을 하는 사람이 그 일로부터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F. 니체,『즐거운 학문』, 354번.)
결과적으로 행운집적기는 버려질 수 없다. 누군가 포기를 하지 않는 한, 포기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각각 더 큰 손해와 더 큰 이익을 받게 된다. 서로를 믿을 수 없는 개개인에게 행운집적기의 포기 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국민의 합의체인 정부가 이를 통제할 수는 없을까? 혹자는 기대를 걸지만, 나는 여기에 대해 반문을 던진다. "전 국민이 마약중독자인 나라에서 마약 단속은 가능할까?"
이 반문은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 번째는 정치적 선택. 국회에 상정된 ‘행운집적기 금지 법안’의 부결이 이를 증명한다. 촛불집회에서 볼 수 있듯 애당초 전 국민적인 반대 속에 국회에 상정된 것이 이미 기적적인 일이었거니와 압도적인 반대표는 이 시대가 포기할 수 없는 집적기의 사회적 입지를 확인시켜주었다.
두 번째는 법안이 통과했다 할지라도 그 것이 유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한 대기업은 최초의 행운집적기를 선보이기 위해, 간단한 원리의 장치를 복제가 어렵게 하는 데에만 꼬박 2년의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조잡한 중국 및 대만 제품의 등장으로 집적기의 원리는 일반에 밝혀졌다. 2020년이 지나며 개인이 제작한 집적기가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이 간단한 장치에 얼마나 손쉽게 노출될 수 있는가를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달콤한 과육에 맛이 든 인류는 그 불행한 끝 맛만으로는 행운의 과실을 포기할 수 없는, 관능적이며 이기적인 생물일 뿐이다. 발전적인 경쟁에의 욕구를 잃은 지금에도 우리가 여전히 아담의 아들이며 이브의 딸이라면, 그리하여 이기심과 질투를 버리지 못했다면. 행운집적기의 혁명은 실패한 셈이다.
이제 아이작 아시모프의 오랜 소설에서처럼 인류는 놀랍게 발전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한계 차감적인 발전에 지나지 않으며, 차츰 누적되는 - 행운보다 긴 반감기의 동위원소들에 둘러싸여 마침내는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행운집적기의 행운이 혹여 우리로 하여금 역사심리학과 같은 기회라도 주게 될런가?
그러나 그것은 소설일 뿐이다. 행운집적기가 보여준 한계를 보자. 인류는 앞으로도 앤서블이나 타임머신을 개발할 수는 없을 것이며 역사심리학과 같은 놀라운 학문을 창조해내지도 못할 것이다. 오히려 행운집적기는 인류가 어떤 합의나 강제적 정책 이행을 통해서도 집적기를 포기할 수 없으리라는 연구 결과에 일조를 하였다.
끝없는 이기심과 경쟁에의 욕구, 불평등의 무시무시한 괴물을 피해 달아난, 이 나긋나긋하기 그지없는 유토피아에서. 이제 이빨과 발톱을 뽑힌 인류라는 이름의 젊은 사자는, 깊은 곳에 이기심을 감추고서. 자신의 평화로운 삶에 안주하여 바보같이. 그저 행복하게.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죽음이라는 것도 모른 채 기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 by | 2008/06/19 05:12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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