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 15일
(액자소설) 트리알츠의 연금술사 中
모 단편에 들어가는 액자소설을,
소설의 구성형식을 바꾸면서 버리게 되어.
여기에 기록으로 남겨둡니다.
트리알츠의 수도 레인은 학술과 마법의 도시였다. 트리알츠는 오래전 몰락하던 제국의 압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했고 혁신적인 사상의 재력가들과 혁명가들의 주도 아래, 외부의 군주들이나 종교적 간섭을 배제한 채 상원이 주도하는 자치적이고 민주적인 정치 체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재력가들은 이전부터 이태리의 메디치 가문처럼 학술과 예술을 장려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고 마법사나 사상가는 이미 그 스스로 훌륭한 학자였던 까닭으로, 그들은 새로운 정치 구조 변화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자유로운 학문의 연구가 권장되는 사회의 분위기로 일신할 수 있었다.
특히 우로보로스라 불리는 트리알츠의 중요한 연금술 학회는 학술원 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아직은 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하기 전이었지만 이미 우로보로스 내, 일단의 연금술사들은 신비주의의 벽을 넘어 마법이나 수학과의 결합을 통해 하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해가고 있었다. 이들은 트리알츠의 정치 체제 완성과 함께 발원한 자연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자신들을 키미스트(chymist *현재의 정확한 철자는 Chemist 이지만 실제로 고어에서는 Chymist가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글의 배경과 분위기를 살리고자 Chymist를 사용하였다.)라 불렀다. 학술원의 작은 골방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젊은 연금술사는 -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으나 - 엄연한 마법적, 수학적 학식을 갖춘 키미스트였고 연금술을 하나의 과학으로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쏟고 있었다. 다만, 그는 실험주의의 영향 속에서도 트리알츠에서는 배척을 받던 형이상학적 사유에 관심이 깊었다.
그의 작은 골방으로 찾아온 것은 멋들어지게 수염을 기른 산뜻한 차림의 젊은 남자였다. 정치 및 국제 정세로 말미암아 합리와 실용적 사유를 으뜸으로 삼던 트리알츠에서는 권력의 상층부에게 세련되었을지언정 간결하고 장식 없는 복색을 강요하고 있었다. 연금술사는 이 젊은 남자를 맞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상원의원님."
의원은 연금술사를 마주하여 잠시 얼굴을 살피다 상대가 내어준 자리로 가 앉았다. 그는 여유 있게 작은 골방 안을 둘러보았다.
"듣던 대로의 연구실이군요, 라인슈타인 씨."
방 안은 커튼이 가려 어둑한 채 촛불과 등잔들이 어스름이 구석구석 빛을 던지고 있었고 틈틈이 들어찬 책상이나 탁자 위로는 책과 실험용 집기들이 두서없이 늘어져 있었다.
"기별 없이 찾아 미안합니다. 전 당신께서 일전에 언급하셨다던 아이디어에 관심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아이디어요?"
라인슈타인은 무모증 탓에 피부가 잔털과 수염 없이 매끈했을 뿐더러 오랜 실내 생활로 창백했다. 피로가 가득하여 퀭한 눈에는 자신의 관심사 외에 무심한 마법사 특유의 이기와 아울러 부단히 주변을 살피는 소심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라인슈타인의 얼굴 한구석에 흥미의 기색이 깃든 것은, 자신의 이론에 관심이 있는 이를 무심히 대할 수 없는 학자의 본능 탓이었다. 더군다나 이 젊은 의원이 그간 벌여온 일들은 라인슈타인으로 하여금 일말의 기대를 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이레 전에 학술원의 작은 회의에서 당신은 '단자'라는 개념을 이야기하였지요?"
"그렇습니다, 의원님.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만."
문득 답을 하는 젊은 키미스트의 얼굴에는 어둑하던 실내만큼이나 침침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러나 당신의 이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말없이 의원을 바라보던 라인슈타인은 잠시 후, 앞에 놓인 실험 집기를 치워 놓고는 그 자리로 작은 두 장의 두루마리를 찾아 꺼내어 놓았다.
"이게 당시의 아이디어들을 메모한 겁니다, 의원님." 그는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논쟁 이후로 더 다듬은 부분도 없고요."
의원은 두루마리들을 집어 등잔불로 다가가 그것을 펼쳐 읽었다. 라인슈타인의 말대로 그것은 메모에 가까웠고 내용에는 두서가 없었다. 그러나 의원이 무어라 묻기도 전에 라인슈타인은 고개부터 저었다.
"그 논쟁에서 많은 사람이 제 의견을 비웃고 내던졌습니다. 그 이후로 전 이론을 정리할 필요성을 달리 느끼지 못했지요."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 탁자 위로 올려놓던 의원은 책상 모서리의 작은 장식품들로 눈길을 돌렸다. 두 장식품은 모두 눈에 익은 것이었으나 그전까지 둘이 한 자리에 놓인 것을 본 바 없었고, 실제로 이렇게 두고 보니 쉽게 설명 못 할 위화감이 있었다.
둘 중 하나는 형이상학적 모형이었다. 정확히 사분할 된 두 개의 동심원 안에는 시작과 끝이 있었고 완벽히 짜인 질서가 있었다. 이 모형은 스스로 경건함을 부여하는 듯 보였다.
한편, 다른 하나는 둥글게 몸을 말고 제 꼬리를 문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그러한 경건함을 조롱하는 익살스런 외설이 있었다. 뱀은 끊임없이 먹고 끊임없이 생성하고 있었으며 나름의 질서는 있었으나 시작과 끝이 없었다.
젊은 의원은 두 모형이 각각 슐레릭 교와 우로보로스의 상징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라인슈타인의 의견이 다른 학자들에게는 물론, 다른 키미스트들에게까지 납득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었다. 새 시대를 맞은 트리알츠에서 권위적인 종교나 형이상학적 사유는 낡은 관습으로 치부되며 경원시 되었다. 이곳 학술원은 그런 상징물이 있기에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생각들을 내색지 않았고, 대신에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어 젊은 키미스트를 바라보았다.
"라인슈타인 씨. 난 당신이 좋은 학자이자 마법사이며, 발견한 진리를 그냥 버려둘 사람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당신의 생각을 소논문의 형식으로 정리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제가 그 일을 후원토록 하지요. 그 소논문을 발행해 다른 학자나 젊은 연금술사들에게 전달해 드리고 내용을 논의할 자리도 마련하겠습니다. 그들이 당신을 지지하고 당신의 이론을 증명하려 노력해줄는지도 모르지요."
젊은 연금술사는 의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의원은 연금술에 조예가 깊지는 않았으나 통찰력이 있었고 화학이라는 정돈되고 체계적인 학문을 세우는 일에도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주로 연금술사들의 참신한 이론을 모아 정리하고 다른 연구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 일은 의도한 대로 서로의 연구를 자극하고 촉진하거나 뜻하지 않게 좋은 단서를 제공하곤 했다. 물론 여기에는 의원의 권력 또한 큰 몫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사가들은 그를 권력적 촉매라 불렀다. 권력이란 제국 시대 권력의 종말과 민주주의의 도래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고, 라인슈타인은 감히 젊은 상원의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 어쩌면 기꺼이 수락했던 걸지도 모르지만.
그리하여 그의 작업이 시작되었고 성과를 담은 소논문이 발표되었다. 젊은 의원은 약속대로 라인슈타인의 소논문을 여러 곳에 전달한 뒤, 다른 학자들과 논의를 할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여러분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회사를 맡은 젊은 의원이 좌중들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발간된 '단자론'을 받아 읽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트리알츠의 학술적 전통은 짧지만, 그 가운데 이처럼 독창적이며 틀을 깨는 연구가 가능했던 데에 상원의 일원으로서 큰 자긍심을 느낍니다. 이제 여기 단자론을 쓰신 라인슈타인 씨를 모시고 간단한 설명을 듣고 논의할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올라오십시오, 라인슈타인 씨."
라인슈타인은 단상 위로 엉거주춤 올라와 자신의 단자론을 설명했다. 모두가 내용을 숙지하였으리라 여겼기에 그의 설명은 간략했고 긴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설명이 끝나자 젊은 의원의 인도 아래 짧은 박수가 있었고 곧 다른 학자들의 질문과 비판이 이어졌다.
첫 질문자는 그와 같은 우로보로스의 연금술사였다.
"단자에 대한 실체가 규명된 바 있소? 이미 트리알츠의 연금술사들이 만물의 근원으로 상정한 원소는 그 실체를 확인하고 분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단자는 그저 관념적 존재에 불과한 것은 아니오?"
"아직 단자는 관념적 차원의 가설일 뿐이지만 사실 그 실체는 마법학의 이론을 통해 어느 정도 규명이 된 것과 같습니다. 이 세계에서 마법이 실재하는 한, 마법을 작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단순 질료인 원소가 아니라 실체인 단자의 차원에서 규명되어야 할 겁니다. 단자는 원소보다 더 심층적인 개념이며 현재의 가설적 과정에서는 관념일지언정 단자 자체는 관념이 아닌 형상으로 이해되어야 하지요."
"원소보다 심층적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원소는 변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연금술사들은 주로 그것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완성된 현자의 돌을 얻진 못했으나 마법적인 힘을 통해 몇몇 질료의 변화를 목격하였습니다. 단순 실체란 변화할 수 없고 변화란 오직 복합체 내에서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즉, 트리알츠의 연금술사들이 근원적 존재로 규정한 원소라는 것도 실상은 다른 근원적 실체의 복합체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이번에는 다른 연금술사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당신의 단자에는 문제가 있소. 여기 논문에 담긴 내용을 봅시다. 만일 단자가 가장 근본적인 실체라고 한다면, 그리고 모든 단자가 동일한 구성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일 성질의 존재들을 어찌 규명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철이나 납들이 모두 각기 다른 성질을 갖고 있지는 않소."
"제 내용을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단자는 성질에서 중첩될 수는 있으나 결국 단위별로는 각자의 개별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신과 나는 같은 사람으로 생물적으로는 같은 종의 중첩된 사람이지만 고유의 개별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당신이나 나는 이미 그 자체로 복합체인 탓에 정확한 비유가 될 수는 없겠지만, 개념을 설명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진 철이라 할지라도 그 조각조각은 각자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갖고 있습니다. 단순한 것 안에 다수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단자도 복합체인 것이 아닙니까?"
아케네 출신의 철학자가 던진 물음에 라인슈타인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다수성의 빈위 자체가 단자를 규정짓는 하나의 속성입니다."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 질문의 고삐를 죄었다.
"그걸 관념적 차원으로 풀어보면 좀 혼란스럽더군요. 당신은 키미스트가 아니었습니까? 당신이 말한 단자의 규정성은 단순한 물질의 차원을 벗어나자면 운명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질서의 세계를 단정하게 됩니다. 철에 비유하자면 당신의 단자론은 그 단자에 이미 속성이 빈위로 내재되어 있어 그 철이 무기가 되거나 모루가 되거나 농기구가 될 운명을 안고 있다고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더구나 예정된 신적 질서라니! 그렇게 상정한 개념이란 당신과 같은 마법사나 연금술사들이 실질적으로 규명하고 접근할 수 있는 건가요? 이건 키미스트의 믿음이 아니라 차라리 슐레릭 교도의 믿음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
"제가 슐레릭 교도라는 것을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처음 불편한 자세로 어릿하게 섰던 라인슈타인도 질문과 답변의 공방 속에서 어느덧 초연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 실체인 단자를 규명하면 규명할수록 이 세상에는 잘 짜여진 질서와 규칙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껏 밝혀낸 단편적인 질서들이 더욱 높은 차원에서는 모두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고 그 안에 어떤 초월자가 예정한 질서가 있는 겁니다. 키미스트들도, 연금술사들도 모두 이런 질서와 규칙을 탐구하고 규명하는 - 그 자신도 예정된 운명 속에 갇힌 구도자들일 뿐인 것은 아닐까요? 누가 신의 뜻을 알겠습니까마는. 우리가 당장에 규명할 수 없다 하여 그것을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학자의 본분이 아닐 겁니다."
소설의 구성형식을 바꾸면서 버리게 되어.
여기에 기록으로 남겨둡니다.
트리알츠의 수도 레인은 학술과 마법의 도시였다. 트리알츠는 오래전 몰락하던 제국의 압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했고 혁신적인 사상의 재력가들과 혁명가들의 주도 아래, 외부의 군주들이나 종교적 간섭을 배제한 채 상원이 주도하는 자치적이고 민주적인 정치 체제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재력가들은 이전부터 이태리의 메디치 가문처럼 학술과 예술을 장려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고 마법사나 사상가는 이미 그 스스로 훌륭한 학자였던 까닭으로, 그들은 새로운 정치 구조 변화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자유로운 학문의 연구가 권장되는 사회의 분위기로 일신할 수 있었다.
특히 우로보로스라 불리는 트리알츠의 중요한 연금술 학회는 학술원 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아직은 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하기 전이었지만 이미 우로보로스 내, 일단의 연금술사들은 신비주의의 벽을 넘어 마법이나 수학과의 결합을 통해 하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해가고 있었다. 이들은 트리알츠의 정치 체제 완성과 함께 발원한 자연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자신들을 키미스트(chymist *현재의 정확한 철자는 Chemist 이지만 실제로 고어에서는 Chymist가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글의 배경과 분위기를 살리고자 Chymist를 사용하였다.)라 불렀다. 학술원의 작은 골방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젊은 연금술사는 -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으나 - 엄연한 마법적, 수학적 학식을 갖춘 키미스트였고 연금술을 하나의 과학으로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쏟고 있었다. 다만, 그는 실험주의의 영향 속에서도 트리알츠에서는 배척을 받던 형이상학적 사유에 관심이 깊었다.
그의 작은 골방으로 찾아온 것은 멋들어지게 수염을 기른 산뜻한 차림의 젊은 남자였다. 정치 및 국제 정세로 말미암아 합리와 실용적 사유를 으뜸으로 삼던 트리알츠에서는 권력의 상층부에게 세련되었을지언정 간결하고 장식 없는 복색을 강요하고 있었다. 연금술사는 이 젊은 남자를 맞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상원의원님."
의원은 연금술사를 마주하여 잠시 얼굴을 살피다 상대가 내어준 자리로 가 앉았다. 그는 여유 있게 작은 골방 안을 둘러보았다.
"듣던 대로의 연구실이군요, 라인슈타인 씨."
방 안은 커튼이 가려 어둑한 채 촛불과 등잔들이 어스름이 구석구석 빛을 던지고 있었고 틈틈이 들어찬 책상이나 탁자 위로는 책과 실험용 집기들이 두서없이 늘어져 있었다.
"기별 없이 찾아 미안합니다. 전 당신께서 일전에 언급하셨다던 아이디어에 관심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아이디어요?"
라인슈타인은 무모증 탓에 피부가 잔털과 수염 없이 매끈했을 뿐더러 오랜 실내 생활로 창백했다. 피로가 가득하여 퀭한 눈에는 자신의 관심사 외에 무심한 마법사 특유의 이기와 아울러 부단히 주변을 살피는 소심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라인슈타인의 얼굴 한구석에 흥미의 기색이 깃든 것은, 자신의 이론에 관심이 있는 이를 무심히 대할 수 없는 학자의 본능 탓이었다. 더군다나 이 젊은 의원이 그간 벌여온 일들은 라인슈타인으로 하여금 일말의 기대를 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이레 전에 학술원의 작은 회의에서 당신은 '단자'라는 개념을 이야기하였지요?"
"그렇습니다, 의원님.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만."
문득 답을 하는 젊은 키미스트의 얼굴에는 어둑하던 실내만큼이나 침침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러나 당신의 이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말없이 의원을 바라보던 라인슈타인은 잠시 후, 앞에 놓인 실험 집기를 치워 놓고는 그 자리로 작은 두 장의 두루마리를 찾아 꺼내어 놓았다.
"이게 당시의 아이디어들을 메모한 겁니다, 의원님." 그는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논쟁 이후로 더 다듬은 부분도 없고요."
의원은 두루마리들을 집어 등잔불로 다가가 그것을 펼쳐 읽었다. 라인슈타인의 말대로 그것은 메모에 가까웠고 내용에는 두서가 없었다. 그러나 의원이 무어라 묻기도 전에 라인슈타인은 고개부터 저었다.
"그 논쟁에서 많은 사람이 제 의견을 비웃고 내던졌습니다. 그 이후로 전 이론을 정리할 필요성을 달리 느끼지 못했지요."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 탁자 위로 올려놓던 의원은 책상 모서리의 작은 장식품들로 눈길을 돌렸다. 두 장식품은 모두 눈에 익은 것이었으나 그전까지 둘이 한 자리에 놓인 것을 본 바 없었고, 실제로 이렇게 두고 보니 쉽게 설명 못 할 위화감이 있었다.
둘 중 하나는 형이상학적 모형이었다. 정확히 사분할 된 두 개의 동심원 안에는 시작과 끝이 있었고 완벽히 짜인 질서가 있었다. 이 모형은 스스로 경건함을 부여하는 듯 보였다.
한편, 다른 하나는 둥글게 몸을 말고 제 꼬리를 문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그러한 경건함을 조롱하는 익살스런 외설이 있었다. 뱀은 끊임없이 먹고 끊임없이 생성하고 있었으며 나름의 질서는 있었으나 시작과 끝이 없었다.
젊은 의원은 두 모형이 각각 슐레릭 교와 우로보로스의 상징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라인슈타인의 의견이 다른 학자들에게는 물론, 다른 키미스트들에게까지 납득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었다. 새 시대를 맞은 트리알츠에서 권위적인 종교나 형이상학적 사유는 낡은 관습으로 치부되며 경원시 되었다. 이곳 학술원은 그런 상징물이 있기에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생각들을 내색지 않았고, 대신에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어 젊은 키미스트를 바라보았다.
"라인슈타인 씨. 난 당신이 좋은 학자이자 마법사이며, 발견한 진리를 그냥 버려둘 사람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당신의 생각을 소논문의 형식으로 정리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제가 그 일을 후원토록 하지요. 그 소논문을 발행해 다른 학자나 젊은 연금술사들에게 전달해 드리고 내용을 논의할 자리도 마련하겠습니다. 그들이 당신을 지지하고 당신의 이론을 증명하려 노력해줄는지도 모르지요."
젊은 연금술사는 의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의원은 연금술에 조예가 깊지는 않았으나 통찰력이 있었고 화학이라는 정돈되고 체계적인 학문을 세우는 일에도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주로 연금술사들의 참신한 이론을 모아 정리하고 다른 연구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 일은 의도한 대로 서로의 연구를 자극하고 촉진하거나 뜻하지 않게 좋은 단서를 제공하곤 했다. 물론 여기에는 의원의 권력 또한 큰 몫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사가들은 그를 권력적 촉매라 불렀다. 권력이란 제국 시대 권력의 종말과 민주주의의 도래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고, 라인슈타인은 감히 젊은 상원의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 어쩌면 기꺼이 수락했던 걸지도 모르지만.
그리하여 그의 작업이 시작되었고 성과를 담은 소논문이 발표되었다. 젊은 의원은 약속대로 라인슈타인의 소논문을 여러 곳에 전달한 뒤, 다른 학자들과 논의를 할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여러분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회사를 맡은 젊은 의원이 좌중들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발간된 '단자론'을 받아 읽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트리알츠의 학술적 전통은 짧지만, 그 가운데 이처럼 독창적이며 틀을 깨는 연구가 가능했던 데에 상원의 일원으로서 큰 자긍심을 느낍니다. 이제 여기 단자론을 쓰신 라인슈타인 씨를 모시고 간단한 설명을 듣고 논의할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올라오십시오, 라인슈타인 씨."
라인슈타인은 단상 위로 엉거주춤 올라와 자신의 단자론을 설명했다. 모두가 내용을 숙지하였으리라 여겼기에 그의 설명은 간략했고 긴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설명이 끝나자 젊은 의원의 인도 아래 짧은 박수가 있었고 곧 다른 학자들의 질문과 비판이 이어졌다.
첫 질문자는 그와 같은 우로보로스의 연금술사였다.
"단자에 대한 실체가 규명된 바 있소? 이미 트리알츠의 연금술사들이 만물의 근원으로 상정한 원소는 그 실체를 확인하고 분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단자는 그저 관념적 존재에 불과한 것은 아니오?"
"아직 단자는 관념적 차원의 가설일 뿐이지만 사실 그 실체는 마법학의 이론을 통해 어느 정도 규명이 된 것과 같습니다. 이 세계에서 마법이 실재하는 한, 마법을 작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단순 질료인 원소가 아니라 실체인 단자의 차원에서 규명되어야 할 겁니다. 단자는 원소보다 더 심층적인 개념이며 현재의 가설적 과정에서는 관념일지언정 단자 자체는 관념이 아닌 형상으로 이해되어야 하지요."
"원소보다 심층적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원소는 변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연금술사들은 주로 그것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완성된 현자의 돌을 얻진 못했으나 마법적인 힘을 통해 몇몇 질료의 변화를 목격하였습니다. 단순 실체란 변화할 수 없고 변화란 오직 복합체 내에서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즉, 트리알츠의 연금술사들이 근원적 존재로 규정한 원소라는 것도 실상은 다른 근원적 실체의 복합체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이번에는 다른 연금술사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당신의 단자에는 문제가 있소. 여기 논문에 담긴 내용을 봅시다. 만일 단자가 가장 근본적인 실체라고 한다면, 그리고 모든 단자가 동일한 구성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일 성질의 존재들을 어찌 규명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철이나 납들이 모두 각기 다른 성질을 갖고 있지는 않소."
"제 내용을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단자는 성질에서 중첩될 수는 있으나 결국 단위별로는 각자의 개별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신과 나는 같은 사람으로 생물적으로는 같은 종의 중첩된 사람이지만 고유의 개별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당신이나 나는 이미 그 자체로 복합체인 탓에 정확한 비유가 될 수는 없겠지만, 개념을 설명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진 철이라 할지라도 그 조각조각은 각자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갖고 있습니다. 단순한 것 안에 다수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단자도 복합체인 것이 아닙니까?"
아케네 출신의 철학자가 던진 물음에 라인슈타인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다수성의 빈위 자체가 단자를 규정짓는 하나의 속성입니다."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 질문의 고삐를 죄었다.
"그걸 관념적 차원으로 풀어보면 좀 혼란스럽더군요. 당신은 키미스트가 아니었습니까? 당신이 말한 단자의 규정성은 단순한 물질의 차원을 벗어나자면 운명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질서의 세계를 단정하게 됩니다. 철에 비유하자면 당신의 단자론은 그 단자에 이미 속성이 빈위로 내재되어 있어 그 철이 무기가 되거나 모루가 되거나 농기구가 될 운명을 안고 있다고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더구나 예정된 신적 질서라니! 그렇게 상정한 개념이란 당신과 같은 마법사나 연금술사들이 실질적으로 규명하고 접근할 수 있는 건가요? 이건 키미스트의 믿음이 아니라 차라리 슐레릭 교도의 믿음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
"제가 슐레릭 교도라는 것을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처음 불편한 자세로 어릿하게 섰던 라인슈타인도 질문과 답변의 공방 속에서 어느덧 초연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 실체인 단자를 규명하면 규명할수록 이 세상에는 잘 짜여진 질서와 규칙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껏 밝혀낸 단편적인 질서들이 더욱 높은 차원에서는 모두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고 그 안에 어떤 초월자가 예정한 질서가 있는 겁니다. 키미스트들도, 연금술사들도 모두 이런 질서와 규칙을 탐구하고 규명하는 - 그 자신도 예정된 운명 속에 갇힌 구도자들일 뿐인 것은 아닐까요? 누가 신의 뜻을 알겠습니까마는. 우리가 당장에 규명할 수 없다 하여 그것을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학자의 본분이 아닐 겁니다."
# by | 2008/06/15 22:51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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